수상집 3 '스타일과 아이디어'
 

미국 인상기

나  운  영

   군맹평상(群盲評象)이란 말이 있다. 소경 다섯 사람이 코끼리를 어루만져 보고 가로되 코끼리는 기둥 같다느니, 담벼락 같다느니 말했다고 하니 생각할 수록 우스운 이야기가 아닌가?
  26일 동안 미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그중 몇 가지만을 털어놓고 싶다.

   첫째는 가족계획에 대한 이야기이다. 워싱턴은 물론이고 보스톤, 뉴욕,시카고,로스엔절레스 등 어디를 가나 흑인이 유난히도 많은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색적 화장과 옷차림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백인은 안 낳는 가족계획을 하는데 반대로 흑인은 낳는 가족계획을 하니 이러다가는 50년 안에 미국은 거의 흑인의 나라(?)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진다. 그것도 흑인끼리만이 아니라 백인 여자와의 혼혈아가 나날이 늘어만 간다니  흑백문제가 자연 해소될 날도 멀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둘째로 로스엔젤레스는 거의 한국의 식민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민국에 등록된 한인이 5만명에다가 등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3만이상 된다고 하니 말이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몰라도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 곳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한인수도 많고 음식점까지 없는 것이 없다. 공부하러 온 유학생 중 약 1할이 공부를 계속하고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니 나머지는 사업 또는 노동을 하고 사는 셈이다. 이렇게 한 도시에 몰려  들고 있는 까닭에 행여나 추악한 한인의 모습을 드러낼까 염려가 되었다.
   셋째로 하와이는 참말로 일본의 식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미국 본토와 달리 흑인이 거의 없다는 점이 눈에 띤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 사이에 원주민과 백인이 끼어 사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다만 한가지 특이한 것은 음악이다. '하와이언 기타' 자체가 매력이 있지만 이것이 원주민들의 타악기와 함께 연주될 때 매우 엑조틱한 무드를 조성한다. 한편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 대학교의 East-West Center는 동서문화의 교류를 통해서 보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큰 뜻을 지니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갖게 한다.
   넷째로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학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이나 모두가 완전 개방식이어서 누구든지 마음대로 서고에 출입할 수 있고 또 그 책과 레코드가 많은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례를 든다면 보스턴대학교 음악대학 도서관에 레코드만 2만장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외국에 있어서의 학교공부는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학교도서관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참말이라는 점을 절감했다. 한편 우리나라 도서관의 경우를 생각해 볼 때 몇몇 진서, 희서 외에는 낡은 책, 시대에 뒤떨어진 책이 대부분이고 신간서적이 너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책장 찢어진 것이라든가 사진을 면도칼로 도려낸 것이 허다한 실정이다보니 완전개방식이란 요순시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다름이 없는 느낌이니 한심하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법을 모르고 있지 않나 싶다. 그 곳 학생, 교수, 사회인들이 열심히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 무언의 교훈을 받았다.
   다섯째로 서점 이야기다. 가는 곳마다 서점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전문서점이 많은데에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G. Schirmer에 들어가니 넓은 방안에 한 쪽 벽에는 이론 서적이 부문별로 진열되어있고, 다른 쪽에는 악보가 역시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고, 또 다른 쪽에는 레코드가 완전히 구비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나도 여기서 무려 세 시간을 찾아 헤맸는데 그 수량이 많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희귀한 것이 또한 많은데는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것만 같았다. 나는 여기서 25여년 동안이나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책을 구했으니 그때의 기쁨은 말로다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나라의 음악인들은 참으로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책도 없고, 악보도, 레코드도 없고--- 혹 악보는 있으나 레코드가 없는 경우, 레코드는 있으나 악보가 없는 경우--- 이런 가운데서 공부를 하기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음악에 관한 한 아마 누구보다도 많은 책과 악보와 레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로서는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선진문명을 따라 갈 수 있을까?
   끝으로 외국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면 이구동성으로 '경화 정'의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기뻤다. 그의 연주를 들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국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경화양을 평가하는 것보다 몇 10배이상 그들은 높이 평가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참으로 세기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인간국보라는 종래의 내 신념을 다시한번 굳히게 되었다.

 <1974. 8. 월간 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