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교회음악의 문제점
-교회음악의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나  운  영

   교회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음악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음악이다. 교회음악은 음악을 통한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예술 자체를 위한 것만도 아니고 사람에게만 들려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1. 교회음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교회 음악에는 엄격하게 말해서 교회음악(Church) 아닌  <교회에서의 음악>(Music in Church)에 속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배 때 사회자가 흔히 "이 찬송을 부르면서 모두 앞자리로 나오시오"라고 광고할 때 이것은 장내 정리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교회음악이 오용되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음악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 또 성가대가 특별 찬송을 할 때 온 교인이 지휘자의 멋진 포즈를 보면서 즐긴다든가 성가대원의 얼굴이나 헤어 스타일을 눈여겨 보면서 듣는다든가 더욱이 성가대를 교회의 악세사리 또는 선전물(?)처럼 생각하여 질보다도 인원수를 늘리는 데에 더 신경을 쓸 때 벌써 그것은 교회음악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린다. 얼핏 생각해 보아도 교회음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야말로 <교회에 있어서의 음악>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2.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
   작곡 기법상으로 볼 때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은 다른 점이 없다. 즉 리듬 멜로디 화성 음색 형식에 있어서 세속음악에서 사용되는 것이 교회음악에서도 사용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작품 자체를 놓고 생각해 볼 때 형식은 같으나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사에 의해 작곡된 찬송가, 성가 독창곡, 성가 합창곡, 앤덤,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미사곡, 모테트 등등은 물론이고 이에 수반되는 기악곡 즉 전주곡, 간주곡, 후주곡과 독립된 종교적 기악곡 등은 어디까지나 그 내용에 있어서 세속음악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서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지나 않을까? 즉 바로크 양식이나 클래식 양식의 것이 보다 종교적이고 그런 양식으로 된 작품이어야만 경건하고 심오해서 교회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든가 서양의 근대적 양식이나 현대적 양식으로 작곡된 것은 보다 세속적이고 더욱이 한국적으로 작곡된 것은 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혼동하거나 「교회음악의 현대화가 곧 세속화를 의미한다」고 단정하려 드는 어리석음과 고집에서 오는 그릇된 판단임을 알아야 한다.
3. 교회음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사가 있는 교회음악 즉 성가는 우리나라 말로 불려져야만 은혜스럽다. 신 구약성서가 각각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가도 번역된 가사로 불러야만 그 뜻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공감할 수 있어서 좋다.
   만약에 가사의 뜻을 잘 모르는 원어로 불려질 때 그것은 <교회에 있어서의 음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야 외국곡인 경우에 그 나라 말로 불러야만 제 맛과 멋이 나는 법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교회음악으로서의 제 구실을 충분히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나의 작품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23편)가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많이 불려지고 있는데 그 곳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교포만을 상대로 영어나 일본말 가사로 노래부른다든가 혹은 외국 사람이 우리 동포를 상대로 외국말 가사로 부른다면 실감이 나겠는가? 역시 외국 사람에게는 그들의 모국어로 노래 불려져야만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작년 가을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성악가가 우리 교포 교회에서 한국말로 내 곡을 부르는 것을 듣고 매우 감탄하면서 의당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자기 나라 사람들 앞에서 부를 때만 사용할 터이니 혹시 일본말로 번역된 가사가 없겠느냐고 묻기에 돌아온 즉시로 일본말로 번역된 가사를 보내준 일이 있었다. 이처럼 성가는 온 교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가사로 불러야만 더 은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둘째로 교회음악에는 신 구 교회의 차별이 없다. 예를 들어 바하, 헨델은 신교의 작곡가인데도 그의 곡을 구교(천주교)에서 즐겨 부르고 있고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은 구교의 작곡가인데도 신교에서 즐겨 부르고 있지 않은가? 즉 교회음악 중에서 성모 마리아에 관한 가사만을 제외하면 신 구교가 공동으로 부른다.
   좀더 비근한 예를 든다면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성가집』에는 신교(합동, 새, 개편)의 찬송가가 60여곡이나 들어 있고 『새전례 카톨릭성가집』에는 30여곡이 들어 있다. 비단 신 구교 뿐만 아니라 신교 안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찬송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성공회 성가집』에는 합동, 새, 개편에 있는 찬송가가 60여곡이나 들어 있다. 따라서 신교 안에서도 적어도 찬송가에 있어서는 교파가 문제시 되지 않는다.

   셋째로 예배에 있어서 교회음악은 가장 중요시되어야 한다. 수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날로 날로 부흥하는 것은 음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배에 있어서 3분의 2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음악일 뿐만 아니라 특히 현대인들은 대체로 설교보다는 성가대의 특별 찬양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 경향이 현저하다. 그러므로 성가대원은 충실히 연습하여 정성스럽게 연주를 해야 한다. 더욱이 특별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나 설 익은 것, 온전치 못한 것을 드려서야 될 말인가?
   한편 교회는 성가대를 좀더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먼저 성가대가 부흥해야만 교회가 부흥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가대는 교회의 여러 부서 가운데서 의당 높은 위치에 놓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가대는 직접 예배를 도울 뿐만 아니라 예배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주일학교 다음 부서 쯤으로 성가대를 인식하는 교회가 많은 모양인데 이것은 참으로 언어도단이요 크나큰 인식부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성가대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 중에 부흥하는 교회를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더욱이 교회음악을 올바르게 인식 못하는 목회자 중에 목회에 성공했다는 말을 나는 아직까지 들어본 기억이 없다.

   넷째로 교회음악은 질에 있어서 세속음악보다 더 앞서야 한다. 서양 음악사가 말해 주듯이 무릇 음악은 교회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항상 교회음악인이 음악계를 주도해 왔다. 우리나라도 찬송가를 통해서 서양 음악이 발전했는데도 오늘날 교회음악은 세속음악보다 작곡, 연주면에 있어서 훨씬 뒤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되니 이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교회음악계에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작곡가나 연주가가 많은 탓도 있지만 음악 전문가라 할지라도 소위 일류급의 음악가 중에서 교회음악에 뜻을 두고 계속 정진하거나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음악이 세속음악보다 뒤떨어지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종교음악과(교회음악과)가 설치된 대학이 많아진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나 다른 과에 비해 지원자 수가 적거나 또는 수준이 낮아 커트라인이 낮은 현상을 볼 때 근본적으로 교회음악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게 된다. 즉 그들은 세속음악 보다 더 힘든 것이 교회음악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에서 --마치 외국의 경우와 같이--일반 대학을 졸업한 뒤에 신학을 전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 음악과(작곡, 성악, 기악)를 졸업한 뒤에 대학원 과정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게 하는 제도가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음악계에 있어서는 작곡 분야가 가장 뒤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기법 자체부터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즉 국적이 분명치 않은 작품, 외국의 2세적인 작품은 고사하고 서양 18세기의 무명작곡가의 것을 모방한 듯한 작품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기법보다도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작품이 도저히 영감의 소산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점이다. 즉 교회음악 작품이란 참회 노래요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부질없이 남을 시기, 질투하거나 모략 중상하려 드는 마음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이 되어야만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이 가난해야 된다. 뿐만 아니라 돈을 위해서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작품을 써서는 안된다. 그런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선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러므로 참회하는 심정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면 반드시 응답이 있을 것이다. 바하가 그처럼 위대한 작품을- <b단조 미사곡> <마태 수난곡>과 <300편의 칸타타>-를 쓴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요 헨델이 침식을 잊고 은혜 가운데서 53곡의 대작인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불과 24일 동안에 완성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힘써야겠다.

   다음으로 작곡 분야에 못지 않게 연주 분야에 있어서도 지휘자나 반주자는 물론 성가대원의 수준이 낮은 것을 뼈아프게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그 원인은 능력보다도 성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성가대 연습에있어서 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주 빠지니 연습이 제대로 될 수 없지 않은가? 성가대원 중에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리이더가 되어 주어야 한다.
   나는 서울 성남교회 성가대를 30년동안 지휘해 오면서 협조적 방해란 말을 자주 체험했다. 내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이 말은 생각할수록 기막힌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협조하는 뜻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방해를 하게 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연습 때에는 나오지 않고 정작 예배 때에만 나타나서 혼자 틀리게 부르는 사람, 반대로 연습 때에만 열심히 나오고 정작 예배 때는 빠지거나 혹은 늦게 와서 일반 교인자리에 앉아 성가를 심사(?)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협조적 방해를 자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능력이 있든 없든 성의를 다하여 봉사하는 정신만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대체로 크리스마스 때마다 헨델의 <메시아>를 부르게 되는데 웬일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년 되풀이하는 곡일수록 점점 더욱 잘 부르지 못하는 듯 싶다. 이 점이 바로 외국 사람들과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국 사람들은 음정, 박자에 대한 기본 문제가 해결되면 제 2 단계로 해석, 표현에 대해 주로 신경을 쓰기 때문에 연습을 거듭하면 할수록 더 다듬어져 더욱 더욱 좋은 연주를 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저 음정, 박자만 비스듬히 맞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연습을 거듭할수록 지루한 생각을 갖게 되어 끝까지 다듬으려 들지 않는 것 같다.
   연주란 자기 자신부터 감격해서 불러야만 듣는 사람도 감동을 받는 법이다. 노래하는 사람 자신이 음정, 박자, 가사에 자신이 없어 전혀 느끼지 못하고 불안한 가운데 부를 때 그것을 듣는 제 3 자가 어떻게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자기가 부르는 성가가 하나님께 상달되려면 자신부터 뜨거운 심정으로 불러야 하고 그러한 노래라야만 온 교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 성가를 통해 은혜에 잠길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날로 날로 교인수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음악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교회음악을 통해서 더욱 은혜를 받는--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는 물론 온 교인이 교회음악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시급한 것은 당초에 교회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해서 사회적으로 출세한 뒤에 교회를 졸업(?)해 버린 수 많은 일류 음악가들이--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성가대를 직접 지도하거나 또는 진실되게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게 될 날이 속히 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바이며 아울러 어린이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음악을 올바르게 가르쳐야만 근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끝으로 모든 예술 가운데서 가장 힘든 것이 음악이며 그 중에서도 교회음악은 최고의 예술이다. 교회음악은 비단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특히 복음을 전도하는 데 있어서나 옛 교우를 다시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고 교회일치운동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월간 「기독교 교육」 1979.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