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한국에서 애창되고 있는 Gospel Song의 문제점

나  운  영

   「Gospel Song이란 무엇인가?」, 「Gospel Song의 시작과 발전」, 「Gospel Song의 성격」, 「한국에서의 Gospel Song」에 대해서는 『교회음악 1977년 봄호』에 실린  전덕영님의 「Gospel Song에 대한 소고」를 참고해 주기를 바라며 나는 다만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Gospel Song의 문제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첫째로 찬송가와 Gospel Song은 구별되어야 한다. 찬송가는 성서적이어야 하고 경건해야 하고 정서적이어야 하는데 Gospel Song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정식 예배 때에 불러서는 안된다.  오늘날 Gospel Song이 대학생 집회, 중 고등학생 집회--심지어는 대예배와 어린이 교회학교 예배 때에도 즐겨 불려지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Gospel Song은 경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동적인 데가 있다. 그리고 창법에 있어서 Pop Song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예배 때에 불려진다거나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애창되는 것은 마땅치 않다. Gospel Song은 마치 유행가나 대중가요와 같은 것이어서 이에 한 번 맛들이면 찬송가는 아예 부르고 싶지도 않게 되어버린다 따라서 예배나 부흥회 등 교회에 있어서의 집회 때에 단지 준비 찬송만으로 부르는 것은 상관 없으나 Gospel Song을 주로 불러서는 안된다. 즉 Gospel Song과 찬송가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이를 동격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우선 막아야겠다.
   둘째로 Gospel Song은 Pop Song과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Gospel Song은 원래 Pop Song을 즐기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YMCA나 YWCA의 모임에서부터 퍼져나가 학교 안에서 또는 교회 안에서 마치 Recreation Song처럼 불려지는 동안에 변질됨으로써 결국 복음적인 가사로 된 Pop Song으로 정착되고 만 느낌이 있다.  따라서 주로 Guitar 반주로 이에 Jazz식 창법을 가미하고 더욱이 손 유희까지 곁들여 부르는 사이에 이제는 차츰 무도(舞跳)로까지 발전(?)될 기세이니 이 또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한 Gospel Song이 많이 나와야 한다. 외국의 Gospel Song은 대체로 Jazz Song 스타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즐겨 부르는 까닭은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외국 곡을 부르지 말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 곡을 많이 내놓으면 되고 또한 우리 곡이 외국 곡보다 여러 모로 보아 우수하다면 자연히 우리 곡을 부르게 될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유명한 부흥사인 이성봉, 유제현, 이명직 목사님 등의 Gospel Song의 가사를 외국 찬송가, 외국 민요, 외국 창가의 곡조에 맞춰 부르지 말고 새로 작곡해서 부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미 5년 전에 한국 찬송가학회 주최 「신작 찬송가 발표회」 때에 <주는 나의 친구>(김원태 작사)를 발표한 일이 있었고 작년부터 시작한 「신작 찬송가 월례 봉헌 예배」를 통해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 <예수를 사모함>, <마귀와 싸우라> 등등을 Gospel Song 스타일로 작곡 발표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마귀와 싸우라>는 개편찬송가 612장 가사에 새로 작곡한 것인데 장구를 가지고 타령 장단을 치면서 이에 맞춰 부르도록 되어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하는Gospel Song은 한국적 리듬과 멜로디와 이에 잘 어울리는 화성으로 된 곡조라야 하고 한국적 창법(민요, 판소리, 시조 등)으로 부르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외국의 Gospel Song은 자연도태 될 줄로 믿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대주의에 물든 우리나라 사람들일지라도 결국은 생리적으로 우리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찬송가는 외국 Gospel Song으로 말미암아 날로 오염되어 가고 있다. 아니 우리나라 교회는 외국 Gospel Song으로 말미암아 이미 오염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끝으로 나는 Gospel Song 자체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때와 장소를 가려서 부르라는 말이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이 드니 이것이 또한 문제로다.  Gospel Song도 먼저 토착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계간 「교회음악」1980.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