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신록 인생

나  운  영

   「인간의 수명에는 한도가 있으니 말하자면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 가는 셈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하루하루 죽어가는가? 인생이란 '하루살이'와도 같은 것이니 나는 언제나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오늘 하루 걱정만도 벅찬데 내일 일까지 앞당겨 걱정하지 말라. 내일 적정은 내일로 미루어 두라'(마태복음 6장)를 항상 명상하면서 거듭나는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낙엽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래도 고속 버스를 타고 다니노라면 계절의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아름답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을의 단풍은 그야말로 금수강산이란 말에 실감이 간다. 이렇게 아름다운 단풍의 색채를 마음껏 감상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애틋한 감상에 젖는다고 하니 무슨 까닭일까? 이는 단풍 뒤에 오는 낙엽을 미리 연상하기 때문이 아닐까? 잎이 모두 떨어져 버린 나무란 고목(枯木)이요 고목(古木)같이 보일지 모르나 오랜 동면이 끝나고 새 봄이 돌아오면 또다시 푸른 잎이 돋아나는 것을 왜 기대하지 못하는가 …. 따라서 낙엽을 보고 부질없이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새 희망을 품고 살자.

   가을은 독서의 계절, 사색의 계절, 추수하는 계절이니 단풍과 낙엽을 마음껏 감상하면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나는 30여년 동안의 숙원이 이루어져 이제는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작곡과 저술등 -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나 자신의 일을 하나하나 해 나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언제 어느 때에 죽음이 나를 엄습해 올지 모르니 나는 내일 걱정은 내일로 미루고 다만 오늘을 뜻 깊게 살아가련다. 시와 낭만이 있는 작품도 좋지만 이젠 철학이 있는 작품을 써야겠다.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 제 16번(작품 135번)>과도 같은 심오한 음악을 써야겠다. 단풍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솔길을 걷거나 또는 낙엽이 내 발에 밟히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낙엽과 더불어 말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고갯길을 더듬으며 나는 오늘도 악상에 잠겨 본다. <주기도>에 이어 나는 요즈음 <사도신경>을 작곡하였다. 이는 음악을 통한 나의 신앙고백이다. 지금 구상 중인 <교향곡 제 14번>이 완성되면 앞으로는 주로 교회음악을 작곡하겠다. 나이 60이 단풍 인생이냐? 70이 낙엽 인생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생이란 마치 사계와도 같은 것이니 단풍인생, 낙엽인생이 끝나고 해가 바뀌면 또 다시 신록인생이 어김없이 오고야 말리라.

 <한국문학 1976.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