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잊을 수 없는 사람
- 임영신 박사님 -

나  운  영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의 어느 날 나는 동아일보사 1층 오른쪽 방 문을 노크했다. 그 방은 대한여자국민당 당수인 임영신 여사가 계신 곳이었다. 물론 나는 당수를 만나 뵈려고 간 것이 아니라 중앙여자전문학교 학장님의 부름을 받아 찾아갔던 것이다.
   일제 시대의 중앙보육학교가 8·15해방이 되자 새로 이름을 바꾸고 음악 교수를 물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이 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던 이영세, 김은우 두 분의 소개로 드디어 구두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당시 약관 23세인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문을 열어 보니 위풍당당한 여장부께서 만면에 미소를 띄우면서 나를 반겨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 나이가 몇이시오?'
  첫 물음에 나는 단박 요즘 신식 말대로 쇼크를 먹고 말았다.
     '--- 스물 셋입니다.'
  아니나 다를 까 순간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이 여사의 얼굴에 번졌다.
     '그러면 우리 학생들과 나이가 비슷하군요.  음악가들은 감정이 풍부해서 그런지 학생들과 종종 스캔들이 생기는 모양인데 그게 문제란 말이야--- 예전에 이화여전에서도 그런일 두어번 있었구---'
   내심으론 '이젠 틀렸구나' 하면서도 최종 판결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가슴은 떨려왔다.
     '그래 결혼은 했소?'
     '금년 6월에 했습니다'
     '부인은 뭘 하시오?'  
     '둘이 다 음악을 합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믿습니다'  웬지 좀 용기가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선배 중에 가끔 여학생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사람들 얘기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비록 음악가로는 대성 못하더라도 윤리 도덕에 어긋나는 것은 안하겠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보며 깊은 침묵 속에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여사가 돌연 말문을 열었다.
     '그럼 내외가 다 나오시오!'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나 하나도 취직이 될까 말까 해서 마음을 졸이고 있던 판에 둘 다 나오라고 하시니 이게 도대체 꿈인가? 생시인가? '네?'하고 반문할밖에. 그러자 여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시면서 '우리 학교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학교이니 두 내외가 와서 열심히 일해 주시오.' 하며 힘차게 나의 손목을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는 보육과, 문과, 경제과의 3과로 개강을 하게 되었고 나는 주로 보육과에서 화성학, 반주법, 오르간 레슨을 담당했다. 합창만은 다른 과 학생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나는 지휘를 하고 아내는 반주를 맡았다.

   어느 땐가는 부학장 김태오 교수의 시 '달밤'에 곡을 붙여 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아내가 독창을 하고 내가 반주를 하여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 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달은 어여쁜 선녀같이 내 뜰 위에 찾아오다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얘기하고 싶구나」

   그 당시 우리는 학교 사택에서 살았는데 이 집 바로 옆이 학장님 저택이어서 이승만 박사는 물론 외국 손님들의 초대 연회가 벌어질 때마다 우리 내외 역시 빠짐없이 참석해서 음악 순서를 도맡게 되었다. 학장님께서 내빈들에게 우리 내외를 자랑삼아 소개해 주시곤 하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5개월 동안 모교인 중앙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까지 32년간을 대학에서만 가르쳐 왔으니 누구보다도 행운아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3세 때부터 대학 교수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모두가 임 박사님의 덕분임을 생각할 때 그 은혜는 내 평생토록 다 못 갚을 것이어늘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결코 부모님의 은혜나 스승, 선배님의 은혜를 잊어 버리는 사람이 되진 말아야겠다. 모든 영광을 부모님과 스승, 선배님에게 돌릴 줄 알고 늘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옳은 일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보답하는 인생이 되어야겠다.
   작곡가로서의 그리고 대학 교수로서의 나의 인생의 첫 출발이 중앙여자전문학교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동안 학교는 자라고 자라 오늘의 중앙대학교가 되고 나도 또한 자라 그래도 뭔가 쓸모있는 일꾼 노릇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나에게 있어 임 박사님은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오래오래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월간 「샘터」 1977.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