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시 생각하는 나의 처녀작

나  운  영

   1946년 6월 29일~30일 조선음악협회 주최 「우리 작품 발표 음악회」 때에 나의 처녀작인 「첼로 소나타」가 초연되었다. 그 때의 연주자는 이강렬, 김원복 두 분이었는데 이강렬형은 음악학교 3년 선배요, 김원복 여사는 민족의 노래 「봉선화」(홍난파 작곡)의 작사자이자 나의 중앙고보 시절의 은사이셨던 김형준 선생님의 따님이시니 당대 최고의 연주가에 의해 나의 처녀작이 초연되었다는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46년 6월 24일 즉 내 나이 24세 때 「첼로 소나타」를 쓰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즉 나는 음악학교 본과와 연구과에서는 작곡을 전공했지만 부과로 첼로를 택해서 이강렬, 전봉초형들과 함께 레슨을 받은 일이 있다.
   첼로를 좀 공부했던 인연으로 일제 말기에는 징용을 피하느라고 경성후생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하기도 했고 채동선, 이영세 선배님들과 현악 4중주를 한동안 하기도 했는데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내심 나도 첼로 소나타을 한번 써 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된 뒤 조선음악협회 위원장인 이영세 선배님으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고 나는 3악장으로 된 「첼로 소나타」를 드디어 만들게 된 것이다. 이 곡의 제 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되었는데 제 2주제를  5음음계로 작곡했고, 제 2악장은 복합 3부분 형식으로 되었는데 <기도>라는 표제가 붙어 있고, 제 3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되었는데 민속적인 멜로디에 굿거리 장단을 곁들여 우리 음악의 멋과 맛을 풍겨 보았다.
   52년 12월 피난 시절 부산에서 나는 제1회 나운영 작품 연주회를 가졌다. 그 때에는 「첼로 소나타」를 김재홍, 정진우 두 분이 연주했는데 안병소 선생님께서 친히 레슨을 맡아 연습을 시켜 주셨는데 연주회를 1주일 앞두고 악보가 분실되었다. 즉 정진우씨가 연습을 마치고 악보를 끼고 만원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만 분실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연주회가 1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원본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첼로 파트만은 김재홍씨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이틀만에 피아노 파트를 다시 썼는데 원본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만들어져서 거뜬히 연주를 하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마 처녀작이었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였던 탓으로 잘 기억되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런 관계로 나는 특별히 이 「첼로 소나타」에 대해서는 애착을 느끼게 된다. 68년 8월 이방은, 임자향 두 분에 의해 라디오 방송을 하기도 했으니 결국 세 번 연주된 셈이다.
   나는 처녀작으로 「첼로 소나타」 이외에 예술 가곡으로는 「달밤」(김태오 작사)를 꼽고 싶다. 이것은 46년 8월에 작곡되어 아내(유경손)에 의해 방송을 통해 초연되었는데 오늘날도 계속 애창되고 있고 한편 성가 독창곡(또는 합창을 곁들인 독창곡)으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꼽고 싶다. 이것은 피난 중인 53년 5월에 단 3분만에 반주까지 완전히 작곡을 끝마쳤는데 이 곡이 나의 반주와 아내의 독창으로 해군본부 교회에서 초연되었을 때에는 그야말로 감동의 눈물 바다를 이루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부산일보 1982.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