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제2의 고향

나  운  영

내고향 가잔다 내본향 가잔다
산넘고 물건너 고개 넘으면
평화론 옛마을 잘도 산다네
집마다 울파주 주렁박 열리고
애 어른 맘좋아 요순적 백성
논밭엔 이삭이 어깨춤 추고
할머니 물레에 아기가 잠드는
그리운 내고향 언제나 가나


   「내 고향」은 노천명이 지은 시(詩)다. 1950년 겨울 서울 중앙방송국 위촉으로 작곡한 이 곡은 요즈음도 중학 3년 음악교과서에 들어 있다.
   나는 고향이란 말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고향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웬일인지 고향이 없는 것만 같이 생각이 든다.
   본적이 나주(羅州)지만 오랜 선조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고향이라면 내가 지금 살고 있지 않는 곳,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추석 때나 성묘하러 가는 곳, 어릴 때 친구들과 뛰놀던 곳, 느티나무가 있고 냇물이 흐르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곳,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는 곳을 머리 속에 그려보게 마련인데 나야 서울 서대문 밖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남들처럼 추억에 남을 만한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만도 아니다. 즉 내가 태어난 집은 서울역에서 서대문으로 향하는 길갓집이었는데, 뒷집이 소문난 흉가여서 밤중이면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하고, 머리 풀은 귀신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나기도 하여 그 때마다 숨을 죽이고 바들바들 떨었던 생각이 난다.
   언젠가 여름 장마 때에 옆집 하수구물이 넘쳐 흘러 우리 집 마당에까지 물이 들어와서 소동을 벌였던 일, 집 근처에서 구세군 악대의 찬송가 연주를 통한 노방전도에 이끌려 아현동 구세군 교회까지 따라갔던 일, 집앞을 지나 가는 대취타에 완전히 홀려 버려 그 음악을 듣기 위해 상여군 뒤를 졸졸 따라 홍제동 화장터까지 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 버렸던 일 등등이 생각난다.
   6세 때에 생물학자, 교육자이자 아마츄어 국악인이었던 선친(나원정)에게 양금 레슨을 받기도 했고, 달마다 두 차례씩 사랑방에서 연주되는 정악을 열심히 들었던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국악에 마음이 끌렸던 것만은 틀림없다.
   전주와 나주가 합쳐져서 전라도가 된 것인데 나주가 금성시로 바뀐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잘못된 것만 같다. 그렇다면 전금도로 이름을 바꿔 버려야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왕 이름을 바꿀 바에는 차라리 전광도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될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는 옛부터 판소리의 고장, 민속음악의 총 본산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날로 날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드니 한없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근본 원인은 우리나라 학교 교육이 국악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유치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음악 일변도의 교육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우리나라에는 국악학과를 설치한 대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4년 전만 해도 민속악을 바탕으로 한 국악학과는 하나도 없었다. 즉 모두가 아악을 중심으로 한 국악학과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 민속학을 중심으로 하는 국악학과가 설치되면서 나에게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의 중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것이다. 이로써 남도의 민속악의 명맥이 드디어 이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2년반에 걸친 학장의 임기를 마치고 후학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나니 착잡한 감정이 오간다. 왜냐하면 2년반이라 짧은 기간에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남대학교 예술대학의 국악학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다른 대학과 달리  - 그 특징을 잘 살림으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한 존재가 되어야겠고 특히 국악의 작곡학적 체계를 세우는 일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항상 '선토착화 후현대화'를 부르짖고 있는 내가 민속악의 본 고장인 광주에 가서 민속학을 바탕으로 하는 국악학과를 위해 국악의 작곡학적 이론을 정립시키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봉사하게 되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이것이 나의 제 2의 고향과의 지울 수 없는 인연이 된 것을 또한 기쁘게 생각한다.
   나의 선조가 대대로 묻힌 곳을 찾았던 기쁨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음악 일변도의 학교 교육으로 말미암아 오염된 우리 겨레의 마음에 우리 국악을 다시 심어주는 일을 위해 한 때나마 민속음악의 본 고장을 뒤늦게 찾아갔었던 것이야 말로 나에게는 고향을 되찾은 기쁨에 비길 수 없는 한없는 기쁨이었다고 느껴진다.
   언필칭 광주는 국악의 본고장이라고 하나 실제로 2년반 동안의 체험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그 위치가 점점 흔들리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으니 이 점을 누구나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다. 즉 전주의 국악계가 광주보다도 더욱 내실을 기하고 있다는 깊은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광주의 국악계는 일종의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제 2의 고향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도 크다 국악의 판도가 광주에서 전주로 바뀌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이대로 좌시할 수만은 없다.
   - 모든 국제적 모임이나 국가적 모임이 광주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광주의 국악계는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가 그 구심점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상호 교류, 협력을 통해 찬란한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제 2의 고향에 대한 나의 간절한 염원이다.


 <월간 「예향」 198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