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홍난파 선생 예찬

나  운  영

  『새문안 교회 85년사』에 의하면 1917년의 새문안 교회 집사 명단에 우리나라 양악 수입기의 3대 공로자인 이상준, 김인식, 김형준과 함께 홍석후와 홍영후(홍난파)가 들어 있다. 그런데 김인식은 1911년에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원인 - 조선정악전습소의 초대 서양악 교사요, 이상준은 조선악.가남창과의 제2회 졸업생(1913년)이요, 홍난파는 서양악. 성악과의 제2회 졸업생인 동시에 서양악.기악과의 제3회 졸업생(1915년)으로서 김인식에게 4현금(바이올린)을 배운 -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요, 홍석후는 홍난파의 맏형으로서 조선악, 현금과의 제 3회 졸업생(?)이요, 김형준은 홍난파의 조카인 바이올리니스트 홍성유의 처인 피아니스트 김원복의 부친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봉선화」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음악이 새문안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홍난파는 우리나라 양악계의 선구자라기보다는 개척자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될 만큼 연주가(바이올리니스트,관현악 지휘자), 음악교육가, 문필가, 작곡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첫째로 연주가로서의 선생은 1920년 12월 19일 「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Sonata  No.1 (Beethoven)」
전 악장을 연주했고,  1924년 1월 19일 우리나라 최초로 「제 1회 독주회」에서 「Sonata  No.2 (Grieg)」의 전 악장과 「Concerto  No.1 (Bruch)」의 제 1, 2악장의 8곡을 연주했고, 1925년 9월 26일 「제 2회 독주회」에서 「Concerto  No.9 (Rode)」 전 악장과 「Zigeunerweisen (Sarasate)」 외 12곡을 연주했고,  1931년 6월 16일 「도미 송별음악회」에서 「Sonata A Major (Vivaldi)」전 악장과 「Andante Tranquillo (Beriot)」 외 3곡을 연주했고,  1933년 5월 5일 「귀국독주회」에서 「Sonata  No.2 (Grieg)」 전 악장과 「Concerto  No.1 (Bruch)」의 전 악장과 「Concerto  (Mendelssohn)」 전 악장을 연주했고,  이밖에도 바이올린 3중주단인 「난파 Trio」(1933)와 피아노 3중주단인 「성서(城西) Trio」(1937년)을 조직하여 실내악 운동을 일으켰으며, 「경성 방송관현악단」(1936년)을 조직하여 1939년에 「Symphony  No.41 "Jupiter" (Mozart)」를 지휘,초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교향악운동을 전개했다.
   둘째로 음악교육가로서의 선생은 1916년 김인식의 후임으로 조선 정악전습소의 교사가 되었으며, 1922년에 중앙보육학교 교수, 1933년에 이화여자 전문학교 강사 및 경성보육학교 교수,1938년에 경성 음악전문학교 교수로서 음악 전반에 걸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한편 『악전대요』(1916년 발행), 『조선 정악보 3편』(1917년 발행), 『광익창가집』(1920년 발행), 『세계 명작 합창가집』(1925년 발행), 『특선 가요곡집』(1936년 발행)을 출판하였다.
   셋째로 문필가로서의 선생은 1919년 2월에 일본에서 음악, 문학, 미술을 주제로 한 순 예술잡지인 『3광』을 창간하여 통권 3호까지 발행했고, 『음악만필』(1938년 발행), 『세계의 악성』(1926년 발행)을 비롯하여 특히 소설가로서도 일가를 이루어 『제 1 창작집 "처녀혼"』(1921년), 『제 2창작집 "향일초"』(1922년), 『제 3창작집 "폭풍우 지난 뒤"』(1923년) 및 「여자의 일생」(모파상), 「아! 무정」 (위고), 「다복한 사형수」(톨스토이) 등등을 번역 출판했다.
   넷째로 작곡가로서의 선생은 1920년 「피아노곡 "애수"」를 그의 『제 1창작집 "처녀혼"』에 발표했던 것에 후에 김형준이 작사하여 오늘날 민족의 노래로 불리어지고 있는 가곡 「봉선화」를 비롯하여 1929년에 『조선 동요 백곡집 상편>』을 작곡 출판했고,  1931년 「바이올린 독주곡 "하야의 성군, 동양풍의 무곡, 애수의 조선, 로망스」를 작곡 출판했고,  1933년에 『조선동요 백곡집 하편』과 『조선가요 작곡집 제10 - 영산시조편』을 작곡 출판했으며, 한편 1939년에 「관현악 조곡 - 즉흥곡, 소선전곡, 동양풍의 무곡」과 「관현악부 독창 조곡 "나그네의 마음" - 고향생각, 옛 동산에 올라, 입 담은 꽃봉오리, 사랑, 관덕정, 그리움, 금강에 살으리랏다」가 「제 1회 전 조선창작 작곡발표 대 음악제」(동아일보사 주최)에서 작곡자의 지휘로 경성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연주되었다.
   15년간 같은 학교에서 함께 일했던 독고 선(중앙보육학교 교수, 경성보육학교 교장)의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실로 다재다능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무엇에나 지지 않는 성격과 남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모든 일을 개척해 나가는 - 강한 의욕에 불타 있었으며, 다정다감하고, 활달하며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멋지게 세상을 살다 간 분이요, 문학, 의학, 사회상식이 풍부하고 구변이 좋고 매우 재미있는 분이고, 성실한 음악 교수였다고 한다.
   여기서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생은 단순한 음악가, 문필가가 아니고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다. 즉 선생은 삼일운동 때에 바이올린을 저당 잡히고 동경에 있는 조선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프린트해서 유학생들에게 뿌리기도 했고, 미국 유학시에 흥사단 단가를 작곡했던 일이 문제가 되어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와 함께 110일 동안 옥고를 치를 때에 건성 늑막염이 재발되어 조국 광복을 못 본채 1941년 8월 30일에 4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으니 그야말로 음악 연주와 음악 교육과 문필과 작곡을 통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다사다난했던 생애였다고 말해도 절대로 광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생을 존경했다. 그의 작품인 가곡 「봉선화, 고향생각, 사공의 노래」, 동요 「고향의 봄, 바닷가에서, 여름, 비누풍선, 종이배, 시골 길, 피리」 등을 즐겨 부른 것은 물론이고,  특히 그의 「Berceuse Slave (Neruda)」,<Indian Lament (Dvorak-Kreisler)」 등의 바이올린 독주와 「독창 조곡 "나그네의 마음"」, 「관현악 조곡」등의 관현악 지휘를 많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인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을 애독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으로 그를 존경했을 따름이고 막연히나마 '나도 자라서 저렇게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보게 된 것뿐이었다. 드디어 1940년 1월에 나는 홍파동 언덕 위에 있는 아담한 붉은 벽돌의 2층 양옥집인 선생 댁의 문을 두드렸다. 나의 처녀작인 가곡 「가려나」가 동아일보사 주최 신춘 문예 현상모집 작곡부문에 당선된 직후였기 때문에 심사위원장인 선생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간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선생에게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받았다. 즉 '외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하여 민족음악을 창조함으로써 - 손기정 선수처럼 비록 나라는 빼앗겼어도 민족의 이름을 온 세계에 빛내라.'는 말씀이었다. 때는 일제 말기인지라 난관이 많았지만 나는 이에 용기를 얻어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작곡을 전공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민족적 아이디어와 현대적 스타일>이 결부된 민족음악 창조의 길을 꾸준히 달리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선생은 나에게 <선토착화 후현대화>의 길을 지시해 주신 것이니 이보다 더 고귀한 유훈이 또 어디 있으랴---.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배경이 없는 예술은 국경을 넘기에도 힘이 든다.』<음악만필 광상소곡 중에서>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음악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재래의 고악(古樂) 그대로를 가정이나 혹은 학교에 들여온다는 것이 이상으로는 좋을는지 알 수 없어도 실제에 있어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서양음악 그대로를 이식해 놓았댔자 역시 전부가 우리네 감정에 적합될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서악과 동악을 막론하고 피차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네의 사상 감정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니 널리 말하면 신 동양음악이 생겨야 될 것이요, 신 한국음악이 생겨야 될 것이다.』 <음악만필 논초일속(동서음악의 비교) 중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스승을 높이고, 음악을 배우는 청년은 선배를 욕하는   것에서부터 발족한다. 그러나 후자는 한국의 경우이다.'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사업을 남겨야 한다.』<음악만필 광상소곡 중에서>
   선생은 『특선 가요곡집』의 선곡은 물론 번역가와 작가를 비롯하여 악보 프린트까지 했으며, 『조선 동요 백곡집』, 『조선 가요 작곡집』도 손수 악보를 펜으로 정서해서 출판했으니 그 정성과 정력에는 감탄과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 실로 선생은 죽어서 수 많은 작품과 사업을 남겼다.
   나는 지금도 선생의 「애수의 조선(홍난파 작곡)」과 「고별의 노래(홍난파 편곡)의 Columbia Record(바이올린 독주-홍난파, 피아노 반주-김영의)」를 종종 감상하면서 선생을 흠모하곤 한다.
   끝으로 1954년 8월 30일 내가 주동이 되어 충무로 1가 향초다방에서 「제13회 기일 기념 홍난파선생 추도회」가 개최되었을 때에 참석한 유지들의 증언을 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김성진: 재인박명이라더니 8.15해방후까지 사셨더라면---. 비행기에 안창남, 자전거에 엄복동, 음악에는 홍난파가 제일 유명했다.
     2. 독고 선: 그는 선각자, 선구자요. 우리 민족의 은인이다. 고인의 장례식은 새문안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시간을 값 있게 쓴 분이다.
     3. 이종태: 선생은 총독부에서 시키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4. 이영세: 일을 착수하던 끝에 협력자가 나서면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른 일을 시작하셨다.
     5. 신봉조: 바이올린을 선생에게 배웠는데 신경질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우리 모두 기념사업회의 발기인이 되자.
     6. 윤석중: 종로 2가 덕원빌당 3층에 연악회가 있었다. 필요성 때문에 동요 100곡을 짓기로 결심하셨는데 하도 급해서 더러는 멜로디를 먼저 쓰시고 나중에 나에게 가사를 부탁하셔서 맞춰 넣었다.
     7. 이흥렬: 경성보육학교 교수 취임 환영회 때에 처음 뵈었는데 내 작곡집을 보시고 격려해 주셨다. 「성서 Trio」를 조직해서 월, 목마다 정기적으로 연습하여 Haydn, Mozart, Beethoven곡을 방송했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경성 방송관현악단이 되었다.
     8. 현철 : 나는 한성 음악강습소 제1회 졸업생인데 한성 음악강습소와 조선 정악 전습소가 합병되었고 고인은 제2회와 제3회 졸업생이다.
     9. 이간구: 좀 더 음악인이 많이 참석했어야 될 것이 아닌가---. 선생이 작고하신 후 이것이 최초의 추도회가 아닌가 싶다. 추도음악회를 열었으면 좋겠다.
   10. 김성태: 양악 초창기의 선각자이며 경성 방송관현악단 제 1회 방송 때에 미완성교향곡(Schubert)을 지휘하셨다.
   11. 이상춘: 아무리 생활이 곤란하더라도 빨리 출세할 생각은 말라. 레코드 가수가 될 생각은 말라고 말씀하셨다.
   12. 윤이상: 오늘날 신 한국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공로는 선생에게 있을 것이다. 동요 백곡집은 전곡이 주옥과 같으며 민족적 정서(우리의 흙 냄새)와 일제에 반항하는 애수가 들어 있다. 우리는 이 유산을 계승해야 할 것이고 이것을 음악적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족>-좌중에서 나운영이 왜 이런 모임을 주도했는지를 따짐-
   13. 나운영: 나는 선생을 동요 작곡가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은 만능이다. 언제나 일하는 사람은 욕을 먹는 법이고, 남을 욕하는 자보다는 욕을 먹는 자가 복이 있다. 음악가협회가 있는데 왜 내가 나서서 이 모임을 가졌느냐 하면 아무도 추도회를 안 열기에 내가 나선 것뿐이다. 난파기념사업회가 속히 조직되고 난파음악상도 제정했으면 좋겠다.

 <부기> 나는 그 후 몇 해 동안 계속해서 추도회를 개최했었는데 1959년 8월 30일에  KBS홀에서 「홍난파 추모음악회」가 전국에 방송되었고, 드디어 1963년 11월 27일에 「난파기념사업회」가 발족을 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매년 난파장학금과 난파음악상을 주어 오고 있으며, 1968년 4월 10일 선생의 탄생 70돌을 맞아 「난파상」을 서울 중앙방송국(현 KBS) 앞뜰에 건립하여 길이길이 선생의 위대한 사적을 선양하기에 이르렀다.

 <「정신문화연구」 제 14집 198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