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운명과 싸워 이긴 베토벤

나  운  영

   음악사상 가장 훌륭한 음악가는 베토벤이라고 합니다. 그 까닭은 그가 일생 동안 갖은 괴로움을 받아 가면서도 끝내 자기의 이상을 실현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훌륭한 작곡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5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어느 누구의 음악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1770년 독일의 서부 라인 강가의 작은 도시 본에서 태어났습니다. 본은 오늘날은 서독의 수도로서 번영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목가적인 조용한 소도시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궁정악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국정에서 일하는 음악가였기 때문에 4세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아버지에게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 모차르트처럼 아들의 이름을 떨치게 하려고 새벽 잠을 쿨쿨 자고 있는 베토벤을 일찍 깨워서까지 강제로 피아노 연습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심한 훈련을 거듭한 결과 8세 때에는 음악회에 나가 연주를 했고, 10세 때부터는 작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4세 때에는 정식으로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으며, 17세 때에는 피아노 독주자로서 연주여행을 떠날 만큼 재주가 뛰어났습니다.
   17세 때 베토벤은 동지들의 격려를 받아 가며 오래 꿈꾸던 음악의 도시 비인으로 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차르트 앞에서 즉흥연주를 하였는데 훌륭한 연주라고 격찬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훌륭한 음악가로서 성공하리라는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닥쳐 왔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만 병으로 돌아 가신 것이었습니다. 생활의 괴로움을 받으시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영영 눈을 감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22세 때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동생과 누이를 맡지 않을 수 없어 생활이 곤란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는 친구 베겔러, 브로이닝 부인, 또 이 부인의 소개로 친하게 된 발트시타인 백작에게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아 가며 오직 음악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베토벤은 30세 때 궁정극장에서 제 1회 연주회를 열어 「제 1교향곡」을 비롯한 명곡을 처음으로 연주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음악가의 생명이라 할 귀에 이상이 생겨 날이 갈수록 귓병이 심해져서 음악은 물론 마주 대하는 사람의 말소리도 듣지 못하게 되자 그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몹시도 고민하던 끝에 그는 32세 때에는 하일리겐시타트에서 자살을 하려고 유서를 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귀한 음악을 저 버릴 수가 없어 마침내 절망을 이겨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그 때의 심정을 그린 글을 친구 베겔러에게 보냈습니다.

     "나는 설령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더라도 끝까지 운명과 싸우렵니다.
      운명은 절대로 나를 꺾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내 목적을 향하여 하루하루 다가서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목적에서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내게는 휴식이란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 음악 속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 이것은 그의 글 중의 한 토막이지만 이 짧은 글을 통해서라도 그가 얼마나 의지가 굳세고 삶에 대하여 경건한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악에 대한 의욕이 더욱 불붙어 33세 때 절망의 고비에서 되살아난 그는 한층 더 힘을 기울여 작곡을 하였습니다.
   그는 전원을 사랑했기 때문에 혼자서 들에 나가 산책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작곡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거닐다가 문득 어떤 악상이 떠오르면 가지고 다니던 스케치북에 그 테마를 적어 두고 그 곡을 마음 속으로 자꾸 전개시켜 갔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곧 오선지에 옮기곤 했습니다. 이 스케치북에 곡을 기록해 둔 것이 무려 수천 페이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들에 나가 거닐며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악상을 즉흥적으로 짓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오랜 구상 끝에 이루어졌습니다.
   저 유명한 「영웅교향곡」의 제 2악장의 첫 테마는 여덟마디밖에 안되는 것인데 일곱번이나 고쳤으며 또 그의 단 하나의 오페라 「피델리오」
중의 한 아리아는 열 여덟 번이나 다시 고쳐서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베토벤은 작곡을 할 때 얼마나 신중히 다루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연주회의 날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데 관객석의 어떤 귀부인이 옆 사람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것을 본 그는 곧 피아노를 치던 손을 멈추고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들려 주는 피아노가 아니다"라고 하며 벌컥 화를 내고 피아노 뚜껑을 닫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때 프랑스 군대의 장교들로부터 피아노 연주를 해 달라고 강요당했을 때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200Km나 되는 길을 걸어 비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같이 그는 무력에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는 듣지 못하지만 남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 주기 위하여 우리 가슴을 울리는 명곡들을 많이 지었습니다.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마치 마술사의 재주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 이름 높은 「전원교향곡」도 귀머거리가 된 뒤에 지은 곡인데 귀머거리 아닌 사람이 지을 수 없는 오묘한 율조가 깃들어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같이 그는 소리 없는 세계에서 정신적인 고통까지 느끼면서 많은 곡을 잇달아 지었습니다. 괴테도 말한 것처럼 그는 정말 정열적인 작곡가였습니다. 흔히 천재는 일찍 세상을 떠난다고 하지만 베토벤은 말년에 이를수록 더욱 원숙해 갔으며 인간의 힘으로는 붙잡기 어려울 만큼 드높은 영감의 세계를 표현했습니다.

   1824년 봄 그가 54세 때 케른트나투아 극장에는 베토벤의 악곡을 듣기 위하여 청중들이 꽉 찼습니다. 이 날의 프로그램은 그의 최대의 걸작이라고 하는 「제 9교향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기악으로만 된 종래의 교향곡과는 달리 합창이 들어 있습니다. 합창곡은 저 이름 높은 독일의 시인 실러의 「환희의 노래」 에 의한 것인데 이 곡은 그의 모든 작품을 한데 뭉뚱그려 놓은 듯한 대작이었습니다.
   이 곡을 연주하는데 이상하게도 오케스트라 앞에는 두 지휘자가 섰습니다. 한 사람은 작곡자인 베토벤이며, 또 한 사람은 평소에도 늘 지휘를 맡고 있던 우믈라우프였습니다.
   베토벤은 작곡 발표 때에는 으례 스스로가 지휘를 해 왔기 때문에 이번 첫 연주도 단념하지 않고 무대에 섰던 것입니다. 마침 연주가 시작되어 베토벤은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르면서 지휘를 했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대부분 우믈라우프의 지휘봉만을 주시하면서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한 악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일찍 없었던 일로서 어느 작품보다도 인간성이 넘쳐 흐르는 이 곡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중을 등지고 서 있는 베토벤은 전혀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토 독창자가 그의 손을 잡고 청중들을 돌아보게 했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극장이 떠나갈세라 박수 갈채를 하는 것을 알고 정중히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 때 청중들은 베토벤에게 경탄의 뜻을 알리고자 모두 일어서서 손을 흔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감격한 나머지 우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답례하고 나면 또 박수를 하여 다섯차례나 답례하여도 박수와 아우성이 그치지 않아 임석경관이 나서서 청중들의 흥분을 진정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비인에서는 왕족에 대한 박수도 세 차례 이상은 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작품을 지어 격찬을 받긴 했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불행했듯이 말년에도 또한 불행했습니다.  그가 56세 때에는 친 아들처럼 사랑하는 조카가 자살을 꾀하는 등 여전히 괴롭혀서 정신적 타격이 날로 심해 갔으며 게다가 병까지 앓게 되어 베토벤은 57세가 되던 1827년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문교부 발행 「중학국어」 1-1 19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