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전위와 대중예술

나  운  영

전위음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항상 전위(前衛)란 말을 즐겨 쓰고 있는데 '과연 전위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명확한 답변을 하기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전위'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근대와 현대가 어떻게 다르며 아울러 언제부터를 현대라고 하느냐의 물음을 받았을 때와 형편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통적이 아닌 새로운 것을 전위라고 규정 짓고 싶다. 즉 다시 말하자면 구체음악, 전자음악, 우연성음악, 불확정성음악, 행동음악을 전위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12음음악도 전통적 수법에 의하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기법에 속하는 것뿐이고 또 이것은 이미 보편화되어 버려 오늘날에 와서는 조금도 새롭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구체음악이나 전자음악은 소재에 있어서나 작곡 과정에 있어서나 전통음악에 비해 매우 혁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한편 우연성음악이나 불확정성음악, 행동음악은 음악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린 것이어서 또한 마땅히 전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전위적인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구체음악, 전자음악, 우연성음악, 불확정성음악도 벌써 별로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차차 빛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위음악은 예술이냐?
   좁은 의미의 전위음악 즉 행동음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 "과연 이것이 예술이냐?"의 물음에 대해서 나는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톱으로 써는 것이 예술인가? 피아노를 돌로 쳐 부셔 버리는 것이 예술인가? 남녀가 벌거벗고 맨발로 피아노를 밟는 것이 예술인가? 이런 행동은 도저히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이런 것이 예술에 속한다면 집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것도, 사람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는 것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행동음악이 전위적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반음악이요, '해프닝 쇼'이며 좋게 말해서 장난이요, 광적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것 같이 구체음악이나 전자음악, 우연성음악, 불확정성음악은 반예술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런 따위의 행동음악은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위음악은 대중적이다.
   대중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대중이란 참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인데 특히 음악에 대한 교양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예술과 요술을, 오락과 오락(誤樂)을, 음악과 음악(淫樂)을, 진짜와 가짜를 제대로 분별하지 하는 관계로 신기하거나 자극적이거나 변태적, 비정상적인 것에 보다 흥미를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피아노를 톱으로 써는 것이라든가, 피아노를 돌로 쳐 부셔 버리는 것이라든가, 남녀가 발가벗고 맨발로 피아노를 밟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구경할 때 열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전위음악은 대중적이라는 나의 표현이 절대로 잘못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기야 교양 있는 넓은 의미의 대중을 무시한 예술이 그 존재 가치가 없다는 말에 조금도 이의가 없으나 교양이 없는 좁은 의미의 대중이 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행동음악이라고 한다면 이런 종류의 전위음악의 앞날을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사이비 존 케이지나 백남준을 경계하자.
   나는 존 케이지나 백남준에 대하여 고의로 과소평가하려는 어리석은 자는 아니다. 도리어 그들의 행동음악에 대해 혹시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존 케이지가 피아노 독주곡 「4분 33초」를 발표한 일이라든가 백남준이 섹스 음악을 발표한 일을 두고 생각해 볼 때 그 결과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모든 과학자들이 기인 또는 광인으로 오인당하는 일이 있듯이 존 케이지나 백남준도 이와 같이 다루어지기 쉬우나 오늘날 그들의 음악이 세계각처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시해야 할 것이다. 다만 예를 들어 에디슨이 발명한 것을 그대로 흉내 낸다면 아무 뜻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 케이지나 백남준을 그대로 흉내 낸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또 어디 있을 까?
  흔히 일본 사람들이 남의 나라의 유행에 대해 너무도 민감하여 흉내 내는 데 여념이 없듯이 만약에 우리나라에서도 남들이 이미 한 짓을 몇 해 지난 오늘날 뒤늦게 흉내 내면서도 전위작가로 자처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카를하인쯔 시톡하우젠도 존 케이지를 모방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카를하인쯔 시톡하우젠은 그의 「피아노곡 제11번」에서 존 케이지의 우연성음악의 아이디어를 더욱 예술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지 절대로 그를 흉내 내는 데 그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이비 존 케이지나 백남준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도리어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진짜와 가짜, 가짜적 진짜와 진짜적 가짜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옥석을 가려야만 한다.

전위음악을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반대하는 태도는 무조건 찬성하는 것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의미의 대중이 전위음악에 대해 무조건 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양 있는 자들은 또한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것도 경계해야 할 점이다. 전통음악에 귀가 젖은 자, 소위 클래식을 즐기는 자 중에는 전위음악을 비롯하여 현대음악에 대하여 아예 외면해 버리고 있는 자가 대단히 많은 듯한데 이는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싫든 좋든 전위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전위음악을 모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음악에서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위음악의 방향에 대해 바른 관망을 할 수 있는 폭 넓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전위음악은 예술화되어야 한다.
   나는 항상 전위음악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때때로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절대로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이것이 예술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전위음악은 어디까지나 실험 단계에서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술에서 예술로, 오락(誤樂)에서 오락(娛樂)으로, 음악(淫樂)에서 음악(音樂)으로, 가짜에서 진짜로 바뀌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근대음악의 시조인 드뷔시가 말하기를 "어제의 불협화음은 오늘의 협화음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어제의 불협화음이 예술화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협화음이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전위음악이 예술화된다면 내일의 전통음악이 될 뿐만 아니라 이로써 또 다른 내일의 전위음악을 낳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위음악의 물결을 막아 보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되 예술화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 아닌가.
대중 예술은 질적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방송이 대중에 아부하는 인상을 주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이 대중 예술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대중은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동백 아가씨」가 방송 금지된 이후 오늘날의 우리나라 대중가요가 훨씬 정화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대중에 아부하지만 말고 대중 속에 뛰어들어 끌어 올리는 일을 해야 되겠다는 것과 아울러 대중적인 전위음악의 예술화가 시급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계간 「예술계」 1970.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