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보청기

나  운  영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면 의례 음악을 들려준다. 지루한 여행에 지친 승객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기 위해 이처럼 서비스를 해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런데 들려오는 음악은 거의가 소위 유행가이며 그나마도 여러 가지가 아니라 대여섯 곡이 항상 되풀이되기 때문에 한 두 시간만 앉아 있어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같은 곡을 복습(?)하게 된다. 그것도 좀 조용조용히 들려 주었으면 모르되 너무 큰소리로 들려주니 우리 같이 유행가를 좋아할 줄 모르는 족속들은 들을 수도, 안들을 수도 없어 그야말로 진퇴난곡이다. (중략) 음악이란 이다지도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일까? 내가 - 베토벤 처럼 - 왜 귀머거리가 못되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차라리 안들려 주었으면….」- 이상은 8년전에 썼던 음악고문이란 수필 중의 일부이다.
   그런데 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것은 도무지 시정되지 않고 있으니 우이독경, 마이동풍이란 말이 절로 머리에 떠오르게 된다.
   예를 들어 노스웨스트 비행기를 타면 이어폰을 나눠주고 오디오 프로그램에 의해 클래식, 재즈, 민속음악 등 열 가지 중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수십가지 프로를 언제나 들을 수 있게 해주는데 어찌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즉 자기가 듣고 싶을 때 이어폰을 끼고 혼자서 들을 수 있으니 남에게 절대로 방해가 되지 않아서 좋고, 그야말로 '듣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보장되니 더욱 좋다. 우리나라에도 기차나 고속버스에 이런 시설이 갖춰졌으면 얼마나 좋으랴….

   요즈음 새벽의 교회 종소리나 더욱이 새벽기도회 때의 통성(通聲) 아닌 통성(痛聲) 기도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져 독실한 기독교 신자까지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음향 공해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어째서 우리는 이와 같은 정신적인 고문을 당하고 살아야만 하느냐 말이다. 육체적인 고문도 견뎌내기 어려운 일이겠으나 정신적인 고문은 이보다 훨씬 더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음향공해가 드디어 신문 사설에까지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요, 오히려 만시지감을 금할 길 없다.

  나는 요즈음 보청기(補聽器) 아닌 보청기(保聽器)란 새로운 단어를 지어냈다. 소음은 물론 남을 비방하는 말, 모략중상하는 말, 아첨하는 말 등 정신위생상 해로운 일체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보호하는 기구'를 발명해 내야 하겠기 때문이다.
   비단 기차나 고속버스뿐만 아니라 시내버스, 택시, 다방, 가정, 거리 등 어디서나 또한 언제나 저질음악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참아 내기 어렵다. TV와 라디오 방송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국민의 절대다수(?)가 유행가를 좋아하게 된 이런 사회풍토 속에서는 8년이 아니라 18년 후에도 노스웨스트 비행기의 시설같은 것이 갖춰질 가망이 없을 듯 짐작되니까 말이다.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