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KYRIE

나  운  영

   평양 태생의 조두남 선생은 작곡가이기 전에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미국인 조셉 개논스에게 사사한 외에는 소위 학벌과는 인연이 멀다.
  8·15 해방과 더불어 만주 하얼빈에서 귀국하여 서울에 오셔서 작곡집 『고향』과, 가곡집 『옛이야기』를 출판하신 후 6·25로 마산에 피난하여 피아노 교습소를 차려 놓고 후진을 지도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제는 마산의 은인으로 온갖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었으니 실향 사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마산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선구자」를 비롯하여 「그리움」,「산」,「뱃노래> 등등 수 많은 가곡을 발표했는데 그 모두가 누구에게나 애창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일까?

  그의 가곡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첫째는 「선구자」,「그리움」,「산」등 서양조이고, 둘째는 「뱃노래」,「산촌」,「풍년 타령」,「분수」,「해당화」 등 민요조이다. 그런데 모두가 음역이 넓지 않고 까다로운 음정이 드물고 -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멜로디로 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애창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소월을 민요 시인이라고 한다면 조두남은 민요 작곡가라고 불러도 좋을 줄로 나는 생각한다. 한편 선생의 가곡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있는데 그것은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을 방불케 하는 피아노의 「카덴짜」이다.
  나는 선생보다 10년 연하이지만 60년대부터 그야말로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즉 선생은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자주 서울에 올라오시곤 했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전화로 불러 내어 그 때마다 오선지를 둘둘 말아 가지고 나타나셔서 작품 초고를 보이시면서 나의 솔직한 평을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만약 몇 가지 의견을 말씀드리면 밤새 고쳐서 다음 날 다시 사보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이야 말로 참으로 겸손한 - 그러면서도 집념이 강한 작곡가라는 것을 알고 더욱 존경심이 우러나곤 했던 것이다.
   끝으로 빼놓을래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모님의 내조이다. 즉 선생이 오늘날 모든 영광을 누리시게 된 그 배후에는 헌신적인 사모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모님은 피아노 교습소에 있어서의 비서요, 뿐만 아니라 가정에 있어서의 비서요, 대변인이요, 학부형(?)이요 - 이제는 평생 간호원까지 겸하시게 되었으니 소위 내조의 공이란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느낌이 든다.
   바라건대 여생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하루 속히 무서운 병마를 물리치시고 우리 겨레에게 더욱 아름다운 노래를 안겨 주시기를 빈다.

 <조두남 제2수상집 그리움 198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