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 미출판

현제명

나  운  영

   「고향생각」, 「산들바람」 「그 집 앞」등으로 널리 알려진 현제명 선생은 홍난파 선생과 더불어 우리 음악사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양악백년사를 더듬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선구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백우용(白禹鏞,1880~1950), 정사인 (鄧士仁,1881 ~1958), 이상준(李尙俊, 1884~1948), 김형준(金亨俊,1884~?), 김인식(金仁湜, 1885~1962),박윤근(朴潤根, 1891~1989), 김인환(金仁煥,1891~1947), 김영환(金永煥,1892~1977), 홍난파(洪蘭坡,1898~1941), 안기영 (安基永,1900 ~ 1980), 박태준(朴泰俊,1900~1986), 김재훈(金載勳,1900~195l), 채동선(蔡東鮮,1901~1953), 현제명(玄濟明,1902~1960)
   백우용은 구한국 군악대의 초청지도자인 엑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의 수제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군악대장이자 지휘자였고, 정사인은 이 군악대의 플루트 연주자로 송도고보 브라스밴드를 육성했고, 이상준은 우리나라 창가작곡과 민요보급에 앞장을 섰다. 또한 김형준은 음악교육자로서 공이 컸었고, 김인식은 합창운동을 통해 교회음악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박윤근은 평양 숭실대학에서 바이올린, 합창, 관현악을 지도했다. 김인환은 평양을 중심으로 브라스밴드 지도에 헌신했었고, 김영환은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서 음악부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홍난파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실내악과 관현악운동에 힘썼다. 안기영은 성악가로 활약하는 한편 가곡 작곡에 앞장을 섰고, 박태준은 동요작곡과 합창운동, 교회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며, 김재훈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음악전문학원을 창설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채동선은 바이올린 연주와 가곡 작곡 활동을 했었고, 현제명은 성악가로서 연전교수로서, 연전을 중심으로 음악발전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음악사의 큰 기둥

   이와 같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선구자가 많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분은 홍난파와 현제명이다. 홍난파가 연악회(硏樂會)와 보육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에 비해 현제명은 오로지 연전 음악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로 현제명은 홍난파에 못지 않게 눈부신 업적을 많이 남겼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크게넷으로 꼽을 수 있다.
   첫째로, 연주가로서의 선생은 타고난 미성(美聲)의 테너로 당대에 안기영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1929년 9월 27일에 개최한 (제 1회 독창회)를 비롯해서 3회의 독창회를 개최했다. 한편 콜롬비아의 청반(靑盤)과 빅터의 적반(赤盤) 예술가의 대우를 받아 「니나」, 「나물캐는 처녀」, 「희망의 나라로」, 「아이 아이 아이」, 「바다로 오라」, 「후니쿨리 후니쿨라」, 「니나의 죽음」, 「오 솔레미오」, 「스패니쉬 세레나데」등의 독창과 김자경, 김수경, 김연준과 함께 4중창으로 찬송가 앨범을 취입 하기도 했다.
   둘째로, 작곡가로서의 선생은 『작곡집 제 1집(1931)』과 『작곡집 제2집』(1933)을 발행했고, 오페라『춘향전』(1950)과 『왕자호동』(1954을 작곡하여 상연했는데 특히 가곡 중에서 「오라」는 그의 대표작이다.
   셋째로, 음악지도자로서 1929년 9월부터 1943년 7월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매일 방과 후에 합창, 밴드, 오케스트라를 지도하는 한편 「연전음악회」, 「연전 지방순회 음악회」, 「하기 음악강습회」, 「전조선 중등음악 경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음악과가 없는 음악부에서 김성태, 이유선,김생려, 이인범, 문학준, 정희석 등 기라성 같은 중진음악가를 배출했다.
   넷째로, 음악사업가로서의 선생은1945년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했고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를 창설하였으니 그의 공적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선생은 성격이 명랑 쾌활하고 활동적이었다. 그래서 연주활동이나 작곡활동 이외에도 학교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을 창설했을 뿐만 아니라 재단법인 한국음악원 이사장, 국립극장 운영위원, 서울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 한국음악협회이사장 등 수많은 직책을 맡았다. 한편 유네스코 국제음악회의 동남아시아 국제음악가회의, 미국 음악교육연합회 제2차 총회 등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는 등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국제적인물이었다.
   선생이 연주가, 작곡가, 음악지도자, 음악사업가 등 그야말로 음악계의 총사령관(?)으로 종횡무진 맹활약을 하게 된 그 배경과 그 당시의 음악계의 현황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연희전문 음악부의 활약

   선생은 대구 계성중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 시절에 합창부와 밴드부에서 모루리(Mowry, 牟義理) 박사와 박윤근 선생에게 음악을 배우고 1923년에 졸업했으며 1927년에 미국에 유학하여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1929년 9월부터 연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음악계에는 이미 안기영이 선생보다 먼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28년에 『안기영작곡집 제 1집』을 발간했으며 이화여전 교수로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으니 선생은 그보다 한발 늦은 셈이었다. 그런데 이화여전은 음악과가 있었고 연전은 음악과가 아닌 음악부였지만 여학생 중심의 활동보다는 남학생 중심의 활동이 더 활발했다. 그리고 이미 1918년에 김영환이 연전 교수로 부임하여 10년 동안 음악부의 터를 닦아 놓은지라 주도적으로 음악활동을 해 나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선생은 14년 동안 연전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1943년 7월에 연전 교수를 사임한 후 9월에 <경성음악학원>을 설립했다. 1945년 12월에 <경성음악학교>로 승격시켰고 1945년 10월에 이학교를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시켰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서을대학교 음악대학이 된 것이다. 1943년 7월 이전에 이미 <경성고등음악학원>에 이어 김재훈이 <경성음악전문학원>을 설립하여 안기영, 이승학, 홍난파, 이흥렬 등이 중심이 되어 구미나 일본에 유학을 못 가고 고민하던 음악학도들을 양성하다가 문을 닫은 직후이므로 선생으로서는 그야말로 때를 만나게 된 셈이다. 한편 관현악 운동만 하더라도, 8 · 15 이전에 연전관현악단 이외에 <중앙악우회 관현악단>, <경성방송 관현악단>, <경성후생악단> 등이 부정기적으로 공연을 갖기는 했으나, 2관편성의 본격적인 교향악단이 발족된 것은 1945년 9월에 창설된 사단법인 <고려교향악단>이 처음인데 이것도 선생의 힘에 의한 것임을 생각할 때 선생이 우리나라 음악계에 세운 공적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것이다.
   한편 선생은 가곡 이외에 오페라 『춘향전』을 1950년에 작곡하여 상연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창작 오페라의 효시라고 흔히 말하지만 실은 1940년에 이미 안기영이 향토가극 『콩쥐팥쥐』,『견우직녀』, 『에밀레종』을 작곡하여 상연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안기영의 월북으로 말미암아 영영 잊혀지고 말았기 때문에 선생의 『춘향전』이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에 연전(세브란스 의전을 포함함)을 졸업했거나 중퇴하고 외국유학을 갔던 사람들 중에 우리나라 양악백년사에 빛나는 음악인들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홍난파(洪蘭坡), 안기영 (安基永 ), 홍재유(洪載裕), 이일래(李-來), 독고선(獨孤璇), 최성두(崔聖斗), 박태원(朴泰元), 이인선(李寅善), 신봉조(辛鳳祚), 김성태(金聖泰), 이유선(李宥善),안신영(安信永), 임동혁(任東爀), 유기흥(柳基興), 김성도(金聖道), 이석화(李碩和), 윤기흥(尹基與), 이용필(李用弼), 곽정순(郭正淳), 곽정선(郭正善), 김관(金管,福源), 황재경(黃材景) 문학준(文學準), 이유성(李有聖),김생려(金生麗), 이인범 (李仁範), 한인환(韓麟桓), 서수준(徐守俊), 김연준(金連俊), 모기윤(毛麒允), 차향기(車享基), 정상록(鄭上祿), 정희석(鄭熙錫), 배석빈(裵錫彬), 김생봉(金生峯),박창해(朴昌海), 유한철(劉漢徹), 이찬영(李燦永), 김신찬(金信燦), 김진하(金珍夏), 김치완(金致完), 이종구(李宗求), 김기령(金基鈴), 호재성(胡在晟), 사상필 (史相弼) (무순)


현제명의 사회적 기여

   우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흔히 역사와 전통을 한데 묶어서 말하지만 전통은 단순히 역사에 따라 다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다. 역사는 오래됐는데 이렇다 할 전통이 없는 경우, 역사는 짧은데 뚜렷한 전통이 있는 경우, 역사도 짧고 전통도 없는 경우, 역사도 길고 전통도 있는경우-이 네 가지 중 연세음악만은 그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수 있으리라.
   연세음악을 나는 아래와 같이 3기로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 1 기 (1918~1955)‥‥요람기
   제 2 기 (1955~ 1964)‥‥태동기
   제 3 기 (1964 이후) ‥‥개화기

   곧, 연전 음악부, 연희대학 음악부 시절이 제1기요, 신과대학 종교음악과 시절이 제2기요, 음악대학 창설 이후가 제3기가 되는데 이 중에서 가장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제 1기라는 나의 견해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줄로 생각된다. 무에서 시작해 관현악단과 합창단, 브라스밴드, 4중창단이 조직되어 정기음악회를 비롯해 정기 지방연주여행, 야외음악회, 하기음악강습회, 중등음악경연대회 등 눈부신 활동이 모두 제 1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1기의 주역을 맡았던 김영환,현제명, 문학준의 피나는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이 중에서도 현제명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되새기게 된다.
   1974년 『연세음악 55년사』가 발행되었는데 이 책에서 선생에 관한 글을 간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 박사의 사회적 기여는 그의 인품과 예술에서 찾아야 한다. 그의 둥글고 부드러운 인품은 언제나 따스한 봄바람을 풍기어 우리 사회에 인화와 단합과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주었다. 그의 예술활동은 우리 나라 양악사상 획기적 공헌을 남기었다. 현 박사는 연희전문학교 재직시에 음악이 교과목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외로 고급음악을 가르치고 연습시켜 오늘날 우리 악단에 유수한 음악가들을 내놓았고 학생합창대를 육성하여 국내외에 순회연주하면서 메마르고 쪼들린 우리 사회에 미(美)와 흥(興)을 돋구어 주었다. 그는 음악을 흔자 좋아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좋아하기를 위주하여 공개음악연주회에 종종 출연하기도 하였고 음악의 보급을 위하여 음악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였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립 주재하였으니 모두 국민의 음악문화 발전에 남긴 공헌이었다. 현 박사는 일제의 탄압과 해방의 혼란기에국민으로 하여금 내적 조화를 얻어 외적 단합과 통일을 차비하려 하였다. 현박사는 일제시대에 이은상 씨의 작사 「조선의 노래」에 느낀 바 있어 그 노래를 작곡하여 『현제명 작곡집 제 1집』 초두에 실렸다가 일제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필경 다른 민족단체와의 관련으로 인하여 교육계에서 추방당하였으니 이 역시 그이가 우리 민족사회에서 차지한 지위를 알려 주는 일단이라 하겠다. 현 박사의 공적생활이 직접 간접으로 우리 사회발전에 보탬이 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것이다. "
(<현제명 박사의 사회적 기여>,백낙준)

  "연희전문에는 음악과는 없었다. 하지만 음악을 애호하는 학생으로 조직된 연전 음악부는 오히려 음악과가 있었던 이상의 보람있는 한 개의 독특한 존재로서, 그 음악의 연주 및 사업이 교내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조선 악단에까지 미치어, 한 개의 확고부동한 전통을 이룩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동시에 아래 회고가 잘 말해 주는 것이다.
   연희전문 창립 당시 제 1대 음악교수는 당시 피아니스트로 독보였던 김영환씨였으니, 동교수의 노력으로 연전 음악부의 탄생 육성을 보게 되었다. 그후 1929년 9월 제2대 음악부 주임교수를 맞이했으니, 이는 당시 악단에서 정정 울리던 성악가요, 현재 고려교향악단의 아버지요, 현 악단의 사업가로 독보요,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의 부장인 현제명 교수였다. 그는 취임 이래 과거  16~17년간 불면불타(不眠不惰)의 노력으로 연전 음악부는 무럭무럭 자라 대내적으로는 음악부의 움직일 수 없는 기초와 대외적으로는 조선악단에 기여한 토대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초유의 관현악단과 취주악단이 성립되었으며,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글리클럽'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남성합창단이 있었다. 연주회 때마다 재청삼청의 박수갈채의 환호성 속에서, 때로는 능청스럽고, 때로는 재치있는, 때로는 미묘한 기(技)의 음성으로 알록달록 수를 놓던 남성4중창단등이 모두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음악부의 사업으로는 춘추 2회의 연주회, 음악계몽운동을 꾀하여 연2회의 지방순연으로 전조선 각도의 방방곡곡 안 밟은 곳이 없고 하기음악강습회, 전조선중등음악콩쿠르대회를 개최하는 등 이런 연주회와 사업의 만개화기(滿開花期)가 모두 이때였으니 연전음악부하면 현제명 교수가 클로우즈업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연희전문 음악부 회고와 전망> 김성태)


포용력이 강했던 현제명

  끝으로 선생과 나와의 만남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일제 말기(1944년 4월) 나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후생악단(京城厚生樂團)에 첼리스트로 입단해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순회공연을 다닌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는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의 후신으로서 단장인 선생이 마지막 프로그램에 독창을 하는 날에는 으레 마스크를 하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서 무대 뒤를 조용히 걸어 다니다가 「니나」 또는 「희망의 나라로」등을 감명깊게 노래하는것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곧, 노래하기 전에 목을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점과 노래하기 전에 정신을 통일시킨다는 점, 연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점 등- 마음 자세를 우리는 본받아야 할 줄로 생각한다. 성악가가 연주 직전에 이야기를 많이 해서는 절대로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무언 중에 가르쳐 주는 귀중한 예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 해 8월에 선생의 곁을 떠났으나 1947년 9월부터 선생의 부르심을 받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에 시간강사로, 다음 해 10월부터는 전임강사로 선생을 가까이 모신 일이 있었다. 선생은 누구에게나 항상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정하게 이아기를 나누는가 하면 자기를 배반했거나 사이가 썩좋지 않은 사람에게도 악수를 청하고 등을 두드려 주면서 금새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포용력이 강한 일면이 있었다.
   이제 연세음악은 제 2의 도약기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의 빛나는 역사와 전통만을 내세우고 자위, 안주할 수만은 없다. 제 1기에 속하는 그 기라성 같은 연세 음악인들 중 많은 인재가 이미 작고한 오늘, 아직도 이 나라의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는 원로는 다음과 같다.
   김성태(金聖泰, 작곡가, 서울음대 학장 역임, 서울음대 명예교수, 예술원 원장), 김연준(金連俊, 작곡가, 한양대 총장 역임, 한양대 재단 이사장), 정희석(鄭熙錫, 바이올리니스트, 고려교향악단 악장 역임, 연세대 음대 학장 역임), 배석빈(裵錫彬, 바이올리니스트, 경희대 교수 역임), 변훈(邊焄, 작곡가,외교관 역임), 변성엽(邊成燁, 성악가, 숭의여전 교수), 김재홍(金在洪 , 첼리스트,이대 교수 역임)
   이에 계속하여 제 2기, 제3기에 속하는 중견 음악인과 신인 음악인에 우리는 주목할 때가 되었다. 이제 전공분야별로 그 명단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박재열(朴在烈, 작곡가, 연세대 음대학장 역임, 연세대 교수), 김동환(金東煥, 작곡가, 중앙대 교수), 공석준(公錫俊, 작곡가, 연세대 교수), 나인용(羅仁容, 작곡가, 연세대 음대 학장 역임, 연세대 교수), 안일웅(安-雄, 작곡가), 함태균(咸泰均, 작곡가, 군산대 교수), 이찬해(李燦解, 작곡가, 연세대 교수), 최동선(崔東善, 작곡가, 서울시립대 교수역임), 이영조(李永朝, 작곡가, 연세대교수 역임, 미국 아메리칸 컨서바토리작곡과장), 이만방(李萬芳, 작곡가, 숙대 교수, I·S C·M 작곡 당선), 이문승(李文承, 작곡가, 서울신대 교수), 정부기(鄭富基, 작곡가, 중앙대 교수), 장영주(張榮宙, 지휘자, 미국 오라토리오 합창단 지휘자), 윤학원(尹鶴元, 지휘자, 선명회 · 대우합창단 지휘자 역임,중앙대 교수), 김홍경(金弘卿, 지휘자,한국 오라토리오협회 합창단 지휘자), 최훈차(崔勳次, 지휘자, 서울신대 교수,대학합창단 지휘자), 심경흠(沈敬欽, 지휘자, 뉴욕코리안심포니 지휘자), 김관동(金寬東, 성악가, 연세대 교수), 최현수(崔顯守,성악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등 수상자), 김금봉(金錦鳳, 피아니스트, 연세대 교수), 이택주(李澤柱,바이올리니스트, 이화여대 교수, 서울시립교향악단 악장), 노진호(盧珍鎬, 첼리스트, 인천시립 교향악단 수석 )

   연세음악의 앞날에 대해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겠다. 따라서 제2기, 제3기의 음악인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연세음악의 제 1기에 대해서-그 중에서도 신화적인 존재인 현제명 선생의 업적만을 자랑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1992. 봄 제12호 계간 연세 『진리· 자유』〉